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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 아프리카는 '처음처럼'
    여행 2017. 10. 6. 17:22

    몇 해 전 우연히 아프리카 케냐로 출장을 가게 됐다. 황열, 콜레라 등 예방 주사를 5대씩이나 맞았지만, 주사의 아픔보다 미지의 대륙을 간다는 설렘이 더 컸다.



    사실 난 출장 그 자체보다 그 나라 특산품이나 면세점에서의 쇼핑이 더 즐거웠다. 출장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다. 물론 새로운 곳을 가 본다는 점은 늘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더 새로운 물건(?)을 보고 지출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해외 출장이라해도 하는 일은 늘 정해져 있고, 나오는 결과물도 비슷하다.


    밖으로 나가면 기본적으로 구입하는 제품 중 하나는 술이다. 면세인 데다 돌아와 선물로 사용하기도 적당하다. 실패 확률도 가장 낮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맞춤형 선물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장식장 한편을 채우기에 나쁘지 않다.

     

    보통 술은 귀국 때 들고 왔지만, 이때는 고생하는 직원들 선물로 한국에서 소주를 가져다 주기로 했다. 한두 병이 아니라 아예 500ml 페트 용기에 담긴 소주 한 박스를 샀다.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일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코노미를 끊었지만 가운데 5인 좌석에 누워가도 될 만큼 사람이 없었던 케냐행 항공기를 타고 12시간을 날아 도착했다.


    한국의 여느 지방 공항처럼 작은 규모의 공항. 심지어 가끔 전기가 나가 입국 절차가 중단 되기도 하는...요즘은 보기힘든 그런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세관만 통과하면 소주 운송은 모든 절차가 끝난다. 즐겁게 마시기만 하면 된다.


    모두의 짐을 챙기고 소주박스가 나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캐리어가 모두 나왔지만 누런 종이박스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잠시 뒤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얼굴이 검은 세관원이었다.


    눈매가 매섭다. 하지만 뭔가 허술해 보이는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이거 술이지?" (is this alcohol? 뭐 대충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렵게 물 건너 반나절이나 날아온 소주를 모두 빼앗기게 생겼다. 물론 한국에서야 3만 원 이면 한 박스를 사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아프리카에서 소주 한 박스는 30만 원이다.



    012345678



    당황하던 우리 중 한 명의 입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디스 이즈 워러~ 해피워러"

    꽤나 괜찮은 생각이었다. 혹시 이 세관원들이 술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묻지도 않았을 텐데... 이 친구들도 확증이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우리 앞에 놓인 소주는 지금부터 워터다. 동료는 '처음처럼'에 적힌 해피 워터라고 쓰인 부분을 세관원에게 보여줬다. 짧은 영어로 이야기하고 그들이 묻는 말은 못 알아듣는척하는 전형적인 외국인 관광객 행세를 했다.


    "헤이, 씨~씨... 디스 이즈 워러, 오케이? 

    디스 이즈 미네랄 워터... 원헌드레드 퍼센트 미네랄 워터"


    여기 봐라... 여기 해피 워터라고 쓰여 있지 않냐, 이건 분명 물인데 왜 너희들 시비 거는 거냐... 이런 뉘앙스였다. 난 그때 '처음처럼' 병 상단에 영문으로 '해피 워터'라고 쓰여 있는걸 처음봤다.


    제조사의 빅픽쳐인지... 알코올이란 말은 한글로 표기돼 있었다. 지금도 의문이다. 왜 알코올은 한글로, 해피 워터는 영어로 표기했을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제조사의 배려인가...


    세관원도 소주가 술로 의심은 되는데, 술이라고 주장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병 색깔마저 신선한 느낌인 초록색이니 더 그랬을 거다. 그렇다고 병을 오픈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기프트, 프레젠트" 등등을 써가며 선물이니 열어 볼 수 없다고 우겨댔다.


    세관원도 고개만 갸우뚱 거리며 병에 코를 가져다 냄새를 맡을 뿐 함부로 제품을 열어보지는 못했다. 열지 않은 소주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수분이 흘렀고 우리는 또다시 영어 못하는 관광객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헤이, 위 테이크 더 버스"  버스를 타야하는데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세관원도 답답했는지 "고, 고"라며 우리를 밀어내듯 내보냈다. 그는 웃음짓는 우리가 사라질때까지 쳐다봤다.


    그렇게 우리는 소주를 무사히 케냐에 반입했다.


    물론 당시는 케냐 직항이 막 생길 정도로 교류가 없었을 때였으니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거기다 페트병에 든 술, 그리고 미네랄 워터 덕에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교류가 많아져 이런 '꼼수'는 더 이상은 통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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